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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윤화의 화식서식(話食書食) 껍데기를 찾아서
2014.02.25 | 조회 : 4,332 | 댓글 : 0 | 추천 : 0

한겨울! 짠기가 채 가시지 않은 싱싱한 생굴에 레몬즙만 살짝 뿌려 바다내음의 굴을 먹어야 굴 맛의 진수라고 생각하곤 했었다. 굴을 먹으면서도 가장 맛있는 굴의 촉촉한 수분을 알게 해주는 보호막, 굴의 외관에는 별 관심이 없었다. 돌덩이처럼 딱딱한 굴껍데기는 내가 먹을 수 있는 먹거리와는 전혀 관계가 없다고만 여겨왔다. 그런데 이건 고흥의 ´피굴´ 맛을 보기 전까지의 생각이었다.

전라남도 오른쪽 끝, 울퉁불퉁하여 뭔가 들어 있는 듯한 복주머니 형상의 고흥은 육지지만 섬과 다름없는 반도다. 한반도는 삼면이 바다로 둘러싸여 있어 다양한 어종을 자랑한다고 배워왔는데 고흥이야 말로 거의 사면이 바다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같은 해초도 섬의 왼쪽이냐 오른쪽이냐에 따라 맛과 모양이 다르다는 것을 고흥사람들은 가르쳐줬다. 몇 해 전 주머니의 윗부분에 해당되는 고흥 과역면의 음식개발을 하러 고흥을 십여 차례 왔다갔다하며 특이한 겨울 국물을 맛보게 되었다. 불투명 회색빛 국물에 굴이 아낌없이 들어가고 깨가 뿌려진 차가운 국물은 식감을 돋우는 빛깔이라고 하기엔 좀 거리가 있었다. 썩 내켜하지 않아하며 한 모금만 살짝 맛보려던 것이 어느새 난 한 그릇을 들이키고 있었다. 그 뒤 ´피굴´이라는 음식에 빠져들었다. 마치 첫인상이 비호감인 남자에게 생각 없이 말 한번 걸었다가 뜻하지 않게 푹 빠져 헤어 나오지 못한 것 같은 기분이었다. 그때까지 난 늘 맑은 국이 시원하고 맛의 완성인양 표현하며 살아왔었다.

고흥 사람들은 ´피굴´을 언제부터 먹어왔을까? 많은 사람들은 단단한 껍데기 안의 굴 알맹이만 빼서 생으로 먹거나 국을 끓여 먹는 것이 고작이다. 물론 껍질채 석화를 구워먹기도 하지만 말이다. 도대체 누가 단단한 굴껍데기를 곰국 끓이듯 끓일 생각을 했을까? 굴껍데기를 낮은 불에서 은근히 끓여 가라앉힌 뒤 윗물만 따라내고 또 끓이는 것을 여러 번 작업하여 그 안에 삶은 굴알을 넣고 시원하게 먹는 것이다. 이것이 ´피굴´이다. 피굴은 가정에서도 만들고 시장통 할머니가 집에서 만들어 가지고 나와 팔고 있기도 하다. 피굴은 술먹은 고흥남자들의 숙취를 말끔히 없애주고 한사발의 동치미를 들이키듯 한 겨울의 시원함을 통쾌하게 던져 주곤 한다. 고흥하면 떠오르는 사람인, 유명한 프로레슬러 김일의 박치기도 피굴을 먹으며 단련된 실력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고 여류화가이자 문학가인 천경자의 혼(魂)도 어린 시절에 먹던 피굴에서 나오지 않았을까 하는 상상도 해본다.

굴껍데기에서 나온 국물 맛이 별미라는 것을 떠나 또 다른 방향으로 곰곰 생각하니 이처럼 경제적인 것이 없지 않은가. 해안가 겨울이면 주변에 널려있는 게 굴껍데기이니 말이다.
고흥 피굴에 푹 빠져 버려서 결국 굴껍데기 삶는 법을 훔치게 되었다. 그리고 그것이 나의 새로운 대단한 발견인양 서해안 춘장대 해수욕장 근처의 음식으로 다시 태어나게 해주었다. 그곳은 매서운 겨울 칼바람이 불면 ‘야, 추워서 정말 좋다!’라고 말하는 김 양식업을 하는 사람이 많이 살고 있는 곳이다. 김양식은 겨울엔 겨울답게 아주 추워야 제격이기 때문이다. 이곳에서 물에 쓸려갈 것 같은 부들부들하고 거무죽죽한 김풀을 김발에 널어 마른 김으로 되는 것도 체험하게 되었다. 도시에서는 김국을 끓여도 마른 김을 부스러뜨려 끓이곤 하는데 이곳에서는 산지의 잇점으로 生물김을 이용하여 국을 끓일 수 있다. 생김국이 생소하다면 요즘 도심에서 잘나가는 한식집에서 겨울에 파는 매생이국을 연상하면 된다. 김국을 만드는데 문제는 육수였다. 生김을 더 시원하게 할 수 있는 방법을 고민하다 여기에 고흥의 피굴 만드는 식으로 굴껍데기 삶은 국물을 응용하게 되었다. 반응이 참 좋았다. 식당 사장은 흥이 났다. 왜? 굴껍데기는 원가가 없는, 즉 버려지는 재료를 깨끗이 씻어 육수를 내면 되니 이 얼마나 신통한 일인가? 서산해안가에서 바닷물을 파는 바닷물자판기를 보고 현대판 봉이 김선달이라는 별명을 지어 주었는데, 버려진 굴껍데기 육수 또한 원가 절감 면에서 상당히 매력적일 수밖에 없었다.

고흥 피굴을 안 뒤부터 여행의 한 줄기엔 늘 껍데기를 찾고 있었다. 북경에 가서는 오리껍데기를 즐기는 베이징덕이 평소와 달리 새삼스럽게 다시 보였다. 십여 년 전부터 단골이 된 이태원의 전복집 ´해천´에서 맛본 해천탕에는 반드시 살아있는 생전복이 껍질 채 들어가야 전복살도 부드럽고 국물 맛이 다르다는 것을 이제야 깨달은 듯 절로 고개를 끄덕였다. 진국 의 국물은 전복살이 아닌 전복의 껍데기가 담당하고 있었던 것이다. 충남 예산 고덕면에 있는 ´도랑골손맛´ 농가에 가면 담근 고추장에 박은 수박껍질장아찌로 손맛을 자랑하는 분이 있다. 이곳에선 수박껍데기도 버릴 수 없는 보물임을 보여주고 있다. 덕유산 아래 토옥동 계곡물로 양식하는 송어를 가지고 껍질튀김을 해주는 맛집에서는 생선 껍질이 그리 정겨울 수가 없다. 돌아보니 동경 야키도리집에서 토종닭껍질꼬치는 곧잘 내가 시켜먹던 술안주가 아니었던가!
먹고 사는 일상으로 하루가 버거운 중년이 아니고 인생의 정의니 올곧함을 운운하던 20대에 읽었던 ´사월(四月)도 알맹이만 남고 껍데기는 가라´로 시작하는 ´껍데기는 가라´라는 신동엽의 시가 껍데기를 찾아 떠나는 오늘 여행길에 떠오르다니... 피식 웃음이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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