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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식품명인 제 58호 이하연

[기획시리즈 VOL2] 시간을 빚고 전통을 품다_대한민국 식품명인을 만나다 : 김치편

2025.06.16 | 조회 : 54,564 | 댓글 : 0 | 추천 : 0

 

 

해물섞박지, 잊혀진 김치의 귀환 - 대한민국식품명인 제58호 이하연

 

“사람으로 태어나 의미 있는 일을 하고 싶었어요.
그게 저에겐 김치였습니다.”

 

 

 

 

전북 익산 웅포. 금강 하류의 비옥한 토양에서 자란 채소와 싱싱한 해산물로 만든 특별한 김치가 있다. 이름도 정감 가는 ‘해물섞박지’. 배추와 무, 동과, 가지, 낙지, 굴, 갓, 미나리 등 갖가지 재료가 어우러진 이 김치는 그 자체로 하나의 작은 잔칫상 같다. 이 김치를 3대째 이어온 이가 있다. 김치명인 이하연. 그는 섞박지를 “옷처럼 고르고 만드는 작품”이라 말한다. 단순한 절임반찬이 아닌, 삶과 문화, 예술이 담긴 김치. 지금부터 그의 철학과 손맛, 그리고 깊은 뿌리를 가진 해물섞박지 이야기를 들어본다.

 

"이하연 명인님의 김치와의 인연, 어떻게 시작됐나요?"

 

“해산물 김치는 운명처럼 제게 들어왔어요 ” 전라북도 익산의 웅포. 금강이 휘돌아 흐르는 너른 들녘과 바다의 숨결이 만나는 이 땅에서 이하연 명인은 태어났다.

“금강이 바다로 흘러가기 직전, 강도 바다도 아닌 그 사이의 맛을 품은 땅이죠. 그래서 해산물도 많고, 곡식도 풍성했어요.”

 

웅포는 과거 조선시대 수운의 요충지로 기능했던 포구다. 곡식과 소금, 해산물이 배를 타고 오가며, 내륙 깊숙한 지역까지 유통되던 시절, 이곳은 그야말로 ‘맛의 길목’이었다. 이 명인은 그 중심에서 자라났다.

 

“저는 음식을 보고 자랐어요. 자연스레 배운 거죠. 쌀, 소금, 젓갈, 생선… 좋은 재료를 아는 눈은 아주 어릴 때부터 길러졌다고 할까요.”   

 

 

 

 

명인의 어린 시절 기억 속에서도 가장 또렷하게 남아 있는 맛은 단연 김치였다. “김치는 재료가 발효되면서 전혀 다른 맛으로 변하잖아요. 그게 신기했어요. 한 입 베어 물면 복잡하고도 조화로운 맛이 확 펼쳐지는데, 그런 감동을 준 음식은 김치밖에 없었죠.” 뛰어난 미각과 감각 덕에 한정식집을 운영하며 김치맛으로 먼저 이름을 알린 그는, 곧 김치의 산업화를 고민하게 되었다. 값싼 외국산 김치가 국내 시장을 잠식하던 시절, 그는 이렇게 생각했다.

 

“이러다 우리 김치, 진짜 없어질 수 있겠구나. 누군가는 이걸 지켜야 한다… 그게 제 일이겠구나 싶었죠.”

 

 

 

 

이하연 명인의 김치 철학은 어머니에게서 비롯되었다. 어머니 故김선철 여사는 전북 임실 출신으로, 1933년 18세의 나이에 웅포로 시집와 시어머니에게서 내림음식을 전수받았다.

 

“어머니는 검은깨로 오방색을 맞추고, 김치 맛의 균형을 위해 밤, 고구마도 사용하셨어요. 김장을 하실 땐 직접 젓갈을 담그고, 대나무밭 토굴에 묻어 숙성시켰죠.”

 

 

 

어머니는 당시 웅포 인근의 공주산 근처에서 음식점을 운영하며, 해산물 김치로도 이름을 날렸다.

 

“어머니 식당은 어부들이 일부러 들러 회포를 푸는 장소였어요. 해산물김치 하나로요.”

 

명인은 아홉 남매 중 여덟째였지만, 어머니는 그에게 유독 엄하게 가사일을 맡겼다. 하지만 그 덕분에 어릴 때부터 자연을 재료로 삼고, 정성과 미각을 갈고닦는 훈련을 자연스럽게 받게 됐다.

 

“달래를 캐고, 버섯을 따러 다니고, 제사 음식이며 떡과 한과를 만들고… 그 모든 게 저한텐 미각의 학교였어요.”

 

지금도 형제들은 “하연이는 엄마 손맛을 그대로 냈다”며 감탄한다. 

 

 

 

 

“우리 동네에선 우리 집만 고들빼기 김치를 담갔어요. 왜 우리 집만 이걸 담글까 싶었는데, 알고 보니 전주 아랫녘에서만 김치로 만들더라고요. 그게 바로 지역의 맛, 집안의 내림음식이죠.” 

 

이처럼 그녀의 김치 인생은 어머니의 손에서 시작되었다. “1984년 결혼 전까지 어머니와 함께 김장을 도왔어요. 어머니께 배운 건 김치 만드는 법만이 아니었죠. 자연을 대하는 마음, 음식을 정성껏 다루는 태도까지 다 녹아 있었어요.”

 

어머니 故김선철 여사는 생전에 임실과 웅포를 오가며 해산물을 아낌없이 넣은 섞박지와 김치들을 담가 명성을 얻었고, 어린 이하연은 그 곁에서 자연스럽게 전통의 맛을 체득했다.

 

그녀는 종종 말한다. 어릴 때는 엄마처럼 살고 싶지 않았다고.

 

“어머니는 하루 종일 앉지도 않고 김치를 담그고 장을 담그셨어요. 그런 엄마가 징글징글했죠. 나중에 저도 좋은 재료 찾아 전국을 돌아다니는 제 모습을 보고 ‘내가 엄마보다 한술 더 뜨네’ 하고 웃었어요.”

 

봉동으로 생강을, 강경으로 새우젓을 사러 다니는 어머니를 따라다닌 어린 기억은 이제 전국 식재료를 찾아 누비는 명인의 일상으로 이어졌다.

 

“김치 맛은 재료에서 시작돼요. 전국 팔도에서 좋은 원료를 찾는 게 기본이에요.”

 

그의 김치는 그래서 담백하다. “설탕, 조미료 안 써요. 자연에서 나온 단맛이 음식에 배어야죠.”

 

지금 그는 김치 제조업과 교육, 연구, 계승을 함께 이어가고 있다. 그에게 김치는 혼자 잘한다고 될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제대로 만든 김치가 제값을 받고, 아이들이 어릴 때부터 좋은 김치를 먹고 자라야 해요. 그러려면 체계가 필요하죠. 저 혼자 할 수 없으니, 함께할 김치 장인들도 키워야 하고요.”

 

 

"많은 김치 중에서 해물섞박지로 명인을 받은 특별한 계기는요?" 

 

“섞박지는 단순히 여러 재료를 섞는 게 아니라, 각각의 재료를 하나하나 정성껏 손질해야 맛이 나요. 예컨대 배추 하나도 그냥 절이지 않아요. 토판염을 써야 아삭한 맛이 살아나고, 간수 빠진 천일염이 꼭 필요해요.

또 낙지나 굴, 소라 같은 해물은 감초물에 데쳐서 비린내를 없애죠. 그 작은 손질 하나하나가 모여 깊은 맛을 냅니다.”

 

해물섞박지는 지금은 생소하지만, 200년 전 조선 후기엔 대표적인 김치였다. 양념이나 재료를 과하게 쓰기보단 발효의 묘미로 맛을 끌어올리는 섬세한 조리법, 그리고 화려한 비주얼은 오늘날 미각의 다변화 시대에도 충분히 경쟁력을 갖는다. 이하연 명인은 말한다. 

 

 

 

“제가 만든 해물섞박지는 단순한 창작이 아니라 전통의 재해석입니다. 1800년대 초 빙허각 이씨의 『규합총서』에 이미 섞박지 조리법이 나와 있어요. 무, 배추, 오이, 가지, 동과 같은 채소에 조기젓, 굴젓, 낙지, 소라 등 다양한 해산물을 넣어 만든 김치였죠. 저희 어머니께서 그 방식을 물려주셨고, 지금은 저희 딸에게도 전하고 있어요.”

 

또한 이하연 명인에게 김치는 ‘창작물’이며, ‘의상디자인’처럼 재료 선택에서부터 조리, 배합, 숙성까지 수많은 디테일을 고려해야 하는 고급 작업이다.

 

“섞박지는 그 자체로 잔칫상이에요. 무, 배추, 동과, 가지에 낙지, 굴, 조개, 젓갈까지… 보통 날에는 만들지 않죠. 음식을 대접하는 마음이 담긴, 정말 정성스러운 김치예요.  굴도 그냥 넣으면 안 돼요. 깨끗이 손질한 뒤 설탕물에 잠깐 담갔다 빼야 단맛이 살아나고 비린 맛이 사라져요. 낙지는 감초물에 데쳐서 질감을 살리고요. 이 모든 재료는 다 손으로 일일이 다듬어야 진짜 섞박지 맛이 나죠.”

 

이처럼 정성과 품격을 담은 해물섞박지는 저장용이 아니라 ‘즉석 김치’다. 담근 직후부터 먹기 시작해, 하루이틀 정도 숙성된 상태가 가장 맛있다.

 

 

 

 

“김치도 사람과 비슷해요. 갓 담가서 풋풋한 맛이 있고, 며칠 지나 깊어지는 맛이 있고… 해물섞박지는 빨리 시어버리기 때문에 오래 두고 먹는 김장이 아니라, 지금 이 계절에 즐기는 계절 김치죠.”

 

김치의 품격에 대해 이하연 명인은 특히 강조한다. 시대가 변하고, 국민소득도 높아졌지만 김치의 가치는 여전히 저평가된 채라는 것. 김치 한 포기의 가격은 여전히 원가 이하로 책정되는 경우가 많고, 명인의 손맛이 담긴 김치조차 ‘비싸다’는 편견에 부딪히곤 한다.

 

“예전엔 국민소득이 65달러였고, 지금은 3만 달러가 넘어요. 460배 이상 늘었죠. 그런데 김치는 여전히 몇천 원, 만 원으로 평가돼요. 저는 김치가 명품으로 인정받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일본 장인정신은 존중하면서, 우리 김치명인의 손맛은 싸게만 사려고 하는 건 안 되죠.”

 

그는 김치도 이제 ‘품격 있는 소비’를 통해 가치를 인정받아야 할 때라고 말한다. 밥맛을 위해 쌀을 고르듯이, 김치도 재료, 제조 방식, 철학을 기준 삼아 고를 줄 아는 소비자의 태도가 중요하다는 것이다.

 

“김치도 재료를 보고, 만드는 과정을 보고, 정성을 보는 시대가 와야 해요. 명인의 김치는 그만한 이유가 있는 거거든요.”

 

 

"김치 브랜드부터 한식당 봉우리 까지... 명인이자 사업가이기도 합니다.  그 여정이 궁금합니다"

 

결혼 후, 그녀는 자신의 삶과 가족을 위해 다시 김치를 꺼내 들었다. 1990년대, 남편을 유학 보내기 위해 전세금 600만 원을 빼 무작정 그를 호주로 떠나보내고, 혼자서 세 살, 두 살배기 아이들을 키우며 길거리 장사를 시작했다.

 

“처음엔 햄버거를 데워 팔았는데 너무 맛이 없더라고요. 그래서 김치로 만두를 빚었죠. 직접 담근 김치에 좋은 돼지고기를 넣고 만든 만두였어요. 밤새 빚어서 아침마다 리어카에 싣고 나가 팔았어요.”

 

그 만두는 금세 입소문을 탔다. 하루 세 시간 자며 만든 ‘길거리 고급 만두’는 줄 서서 사는 명물이 되었고, 그녀는 장사에 눈을 뜨게 됐다.

 

“그때 깨달았어요. 사소한 음식이라도 내 가족에게 먹인다는 생각으로 정성껏 만들면 반드시 통한다는 걸요.”

 

 

 

 이후 다양한 외식업 성공을 거치며 드디어 1997년, 서울 역삼동에 한정식 전문점 ‘봉우리’를 열었다.

 

 “정식 메뉴도 좋았지만, 손님들은 오히려 반찬으로 나간 해물 섞박지와 김치 맛을 더 기억하셨어요. 김치 먹으러 오시는 분들이 늘었죠.”

 

가정식 반찬처럼 정성껏 만든 김치는 식당의 숨은 주역이었다. 손맛과 정성, 좋은 재료에서 우러나는 깊은 맛은 단골의 입을 통해 퍼졌고, 그녀는 ‘김치 잘하는 사장님’으로 먼저 이름을 알렸다.

 

 

"당연한 얘기지만, 우여곡절도 있었다고요?"

 

2003년, 뉴스에서 중국산 김치가 수입되는 장면을 본 그는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밥상에 김치까지 수입된다니, 그건 아니었어요. 그날부터 김치 사업을 해야겠다고 마음먹었어요. 성격이 급하거든요. 바로 공장 차렸어요.”

 

하지만 준비되지 않은 창업은 혹독한 대가를 안겼다. 제조와 유통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던 그는 사기를 당하고 큰 실패를 겪는다. 단양의 첫 김치공장은 외식업으로 벌었던 돈을 통째로 날리며 문을 닫았다.

 

“그땐 참 많이 울었죠. 하지만 덕분에 인생을 배웠어요. 겸손해졌고, 공부도 더 하게 됐죠.”

 

 

 

 

실패 이후, 그는 김치와 식재료 연구에 몰두했다. 조선시대 김치 문헌을 분석하고, 발효과정과 숙성원리를 체계화하는 데 집중했다.

 

그렇게 만들어낸 전복김치, 홍어김치, 빙어김치 등은 수많은 대회에서 수상하며 ‘이하연표 명품김치’로 자리매김하게 된다. 

그리고 마침내 2014년, 제철 해산물을 섞어 담근 ‘해물섞박지’로 대한민국식품명인 제58호로 지정되었다.

 

“넘어졌기에 다시 일어설 수 있었어요. 그 경험 덕분에 김치제조업을 하는 분들의 고충도 이해하게 됐고요. 지금 김치협회 회장을 맡고 있는 것도 그때의 실패가 자산이 되어 가능했던 일이에요.”

 

 

"김치의 계승과 세계화를 위해 다양한 활동을 하고 계신다고요?"

 

“혼자 김치를 잘 담그는 것으로 끝나는 게 아니라 함께 전하고, 가르치고, 이어가야 진짜 명인이 되는 겁니다.”

 

명인의 길은 결코 감각만으로 완성되지 않는다. “왜 그렇게 담그는지”에 대한 과학적 근거와 역사적 맥락을 갖추는 일이 중요하다고 생각한 이하연 명인은 발효과학을 전공하기 위해 대학에 진학했다.

 

김치를 가르치기 위해 더 깊이 배운 것이다. 이후 김치엑스포, 농림부 장관 표창, 대통령 표창 등 수많은 대회를 휩쓸며 이름을 알렸고, ‘어딤채 프로젝트’와 같은 국가 단위 김치 사업에도 깊이 관여했다.

 

김치의 세계화는 결국 ‘사람’에서 시작된다고 믿는 이하연 명인. 그는 경기도 덕소에 위치한 자신의 교육장에서 도제식 김치 수업을 운영하고 있다.

이론과 실기를 겸비한 김치 교육 프로그램에는 전통 간장, 젓갈 만들기까지 포함된다.

 

전국 초·중·고는 물론, 세계 각국에서 김치 강의를 펼쳐온 그다. 이탈리아, 벨기에, 태국, 캄보디아, 영국, 일본 등 수많은 국가에서 김치를 직접 담가보게 하며 김장 문화를 전파했다.

 

특히 유튜브 채널 ‘김치쌤 이하연’은 10만 명에 달하는 구독자를 보유하고 있다. 계절별 김치 담그기부터 시절음식, 재료 고르는 법까지 그녀가 쌓아온 모든 노하우를 아낌없이 전하고 있다.

 

“명인이 되었다고 끝이 아니에요. 김치 레시피만 100개는 가지고 있어야 진짜 김치명인이죠.”


 

2020년 11월 22일, 김치가 대한민국의 공식 법정기념일을 가진 첫 음식이 됐다. ‘김치의 날’은 김치가 11가지 재료로 만들어져 22가지 효능을 낸다는 의미로 제정되었고, 이는 김치산업에 종사하는 이들에게 큰 자긍심이 되었다. 

 

“김치한테 생일을 만들어준 것 같았어요. 우리도 이제 이 일을 자식에게 물려줄 수 있겠구나, 생각하게 되었죠.”

이후 미국의 캘리포니아, 버지니아, 뉴욕, 워싱턴 DC 등에서도 ‘김치의 날’이 기념일로 지정되었고, 이는 김치가 단지 음식 그 이상임을 증명했다.

 

 

"앞으로의 꿈이 있다면?" 

 

그는 지금, 김치 체험 박물관과 김치 테마파크를 꿈꾸고 있다. 단순히 전시된 김치를 구경하는 공간이 아닌, 배추를 절이고, 속을 채우고, 김장날 문화를 되살릴 수 있는 ‘살아 있는 공간’이다.

 

“그곳에 제가 직접 살면서 김치를 담고, 설명하고, 김치 밥상도 차려드리고 싶어요. 강의 전에 우리 소리 한 가락 읊으며 말이죠.”

 

이하연 명인은 “99세 팔팔할 때까지 김치를 담그고 싶다”고 말한다. 아직 체력도, 열정도, 전할 이야기도 넘쳐난다.

 

 

 

 

이하연 명인의 손끝에서 태어난 해물섞박지는 단지 반찬이 아닌 ‘이야기’이며 ‘예술’이다. 김치의 전통을 지키고 계승하면서도, 오늘의 식탁에 어울리는 품격을 더해내는 작업. 그것이 바로 그가 말하는 ‘김치명인의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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