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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윤화의 맛있는 트렌드_진정성 채식, 열 명의 농부
2024.04.15 | 조회 : 127,160 | 댓글 : 0 | 추천 : 0
이윤화의 맛있는 트렌드
진정성 채식, 열 명의 농부

충주 중심가에서 시골길로 한참을 달려갔다. 도무지 식당이 나올 것 같지 않은 인적 드문 분위기의 마을이다. 마침 마을 할머니 두 분이 서 계시기에 ‘장안농장 채식뷔페’ 또는 ‘류근모와 열 명의 농부’를 아시냐고 물으니, 묻기에도 어려운 긴 상호를 전혀 잘 알아듣지 못하셨다. 다시 이 동네에 혹시 식당이 있냐고 간단히 물었다.
그랬더니 한 할머니가 손가락으로 한 방향을 가리키며 “저기 식당인가 뭔가 하나 있는데... 거기로 사람들이 종종 오네. 저쪽으로 쭉 들어가 봐유~”라고 알려주셨다. 그리고 두 분이 하시는 말씀이 뒤로 들려왔다. “고기도 없고 상추 같은 풀만 있던데, 집에서 먹지 여기까지 뭐하려고 그렇게 오나...”

9년 전 ‘열 명의 농부’를 찾았을 때의 기억이다. 지금이야 비건, 채식이 시대의 트렌드이며 고기보다 비싼 채소라는 개념도 많이 늘었다.
하지만 ‘열 명의 농부’ 식당의 오픈 초기만 해도 한적한 시골에 있는 채소 식당은 많은 이에게 무척 생경한 것이었다. 더구나 지천에 깔린 것이 온통 채소인 농촌 사람들에게 그곳은 더더욱 특별할 것이 없었기에 풍성하고 싱싱한 채소 밥상을, 정성 손맛이 밴 집밥 같은 밥상을 물어물어 찾아온 도시 사람을 이해할리 만무했다.

당시 어렵사리 찾아간 식당에 들어서자마자 깜짝 놀랐다. 은은한 클래식 음악이 흘러나오고 따뜻한 조명과 환한 햇살이 비치는 밝은 분위기는 농가 식당에 대해 은연중에 품고 있던 선입견을 전환시키기에 충분했다.
뷔페 음식들은 각각 화려한 별식은 아니지만 모두 재료의 신선함을 갖추었고 촉촉하게 정성의 맛이 깃들어 있었다.

20여 가지가 넘는 쌈 채소가 신선하고 쌈장이 짜지 않아 실컷 싸 먹을 수 있었다. 재밌는 것은 이 ‘쌈장’인데 농장 주최 쌈장 경연 대회에서 1등 한 명물이라는 설명이 흥미롭다. 먹어보니 역시 1등감 답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분도미 현미밥이란 푯말을 마주하니 먹기 전부터 거친 식감의 부담감이 몰려왔다. 그런데 웬걸! 씹으면 씹을수록 고소하고 부드러운 목 넘김이 일품이다. 이게 쌀맛이고 밥맛이구나를 제대로 알려준다.

나무 찜기 속의 따끈한 두부도 있고 보이차, 양파즙, 양배추즙, 채소 수프즙 등 각종 건강즙도 골라 먹을 수 있게 마련해 놓았다. 여러모로 신선한 경험이었다. 조용한 시골 한복판에 자리한 것도, 바깥 풍경과 상반된 모던하며 쾌적한 식사 공간도, 어느 것과도 타협하지 않은 채식 뷔페도, 모든 게 가슴에 깊이 와닿았다.
그리고 같은 해, 나는 모 지역 농업인들 20여 명을 인솔하여 소위 선진지 견학 명목으로 이곳을 다시 찾았다. 하지만 사람들의 반응은 제각각이었다. 채소의 참맛을 쾌적한 공간에서 즐길 수 있다고 좋아하는 분들도 있었지만 많은 중년 남성들은 심드렁한 표정이었다. 돈 주고 풀떼기를 먹으러 여기까지 왔나 하는 항의의 표현 같았다. 어느 정도 짐작은 했지만 예상보다 채식을 대하는 온도차가 확연히 느껴졌다.

식사가 끝나고 식당 뒤 농장의 흑돼지 우리, 장안쌈채소박물관 등 찬찬히 해설을 들으며 둘러보았다. 오늘의 밥상이 어떠한 철학을 갖고 만들어졌는지 알게 되면서 많은 이들이 이 뷔페식당이 여느 식당처럼 그냥 만들어진 게 아니구나 하는 것을 조금씩 이해하는 눈빛이 되어갔다.
장안농장 류근모 대표는 IMF 시절 사업이 힘들어져 모든 것을 뒤로하고 시골에 내려와 늦깎이 농부가 됐다. 여러 우여곡절 끝에 남다른 시도로 유기농 쌈 채소 사업과 더불어 생태순환농업을 실천했다. 그리고 이 모든 과정을 담은 농업 일기를 매일 카페에 기록하고 있다. 어느덧 20년째. 이 과정 속에서 2014년에 유기농 쌈 채소로 채식뷔페식당까지 오픈한 것이다. 모두 처음 가는 길이었으리라.

외식의 생태를 지켜보고 분석하는 직업을 오랫동안 가지고 있다 보니 내 나름의 ‘신뢰 식당’의 기준이 있다. 그것은 초기 철학이 변하지 않는 지속 가능 식당이다. 앞서 소개한 방문기는 9년 전의 경험을 바탕으로 했다.
그리고 최근 그 식당을 다시 방문했다. 유기농 채식뷔페식당이 우리 사회에서 오래 존속할 것이라는 것을 장담할 수 없었기에 방문 전 식당의 존재여부를 확인하고 식당으로 향했다. 생존 소식은 기뻤으나 일말의 불안감은 남아있었다. 지금까지 초기의 의지와는 달리 변해버린 식당을 많이 봐왔고 생존하기 위해 타협할 수밖에 없는 외식 현장을 수없이 겪었기에 이곳 역시 마찬가지일 수도 있다고 여기며 식당 문을 열고 들어갔다. 기쁘고 놀랍게도 분위기와 맛 모두 예전 그 모습 그대로다.
오히려 시간이 흘러 안정감이 보태졌다. 특별한 동행자였던 나의 일본인 셰프는 한국 채소의 퀄리티에 감탄을 금치 못했다. 달라진 것은 건강즙 같은 선택 음료 대신 보다 대중적인 유기농 원두커피와 보이차가 자리하고 있었으며 채소 수프, 맑은 장국의 충주사과국수 등 아기자기한 구성이 눈에 띈다.
긴 상호는 이제 ‘열 명의 농부’로 불리고 있다. 고객들의 구성도 여성 채식 옹호자만이 아닌 일반 남성들이 꽤 많은 보여 세월과 함께 음식에 대한 인식도 많이 달라졌음을 체감할 수 있었다. 식재료의 원물을 뜻하는 바대로 생산하니 코로나와 같은 천재지변도 채식의 냉담한 고객층에 대해서도 아랑곳하지 않고 꿋꿋이 올 수 있었으리라.
일상 한식 분야 속 ‘비건’의 가능성
비건 음식점의 파이는 커지고 있으나 다양성의 부족은 여전히 해소해야 할 과제다. 특히 국내 외식 분야에서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것이 ‘한식’인데 반해 비건식의 일상 한식 분야 접목은 다소 지지부진한 경향이 있기에 전 연령층으로 확산되는데 많은 제약이 따르는 것도 사실이다.
비건식을 지향하는 주 소비층이 젊은 여성들인 만큼 간단한 샌드위치나 햄버거 같은 양식이나 샐러드류, 베이커리류, 종교적 기반으로 음식 문화가 형성된 태국, 인도 등 아시안 푸드 정도가 일반적으로 가족 단위나 고령층 소비자와 함께 즐길 수 있는 선택지는 상대적으로 부족한 것이 사실이다.
또한 해외 시장에서 최근 K-푸드 열풍과 함께 한국식 비건 프랜차이즈는 성장 가능성이 높을 것으로 풀이되고 있다. 한국 음식 자체가 북미와 유럽에서는 건강식으로 통하는데다 비건 음식에 대한 사회적 인식이 열려있고 최근 김밥, 순두부찌개 등의 인기를 놓고 보더라도 식물 기반 식재료가 주가 된 요리들이 효과적인 한식 전도사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며 건강식, 맛있는 채식의 이미지로 한식 자체를 포지셔닝 한다면 비건 전문 한식 프랜차이즈는 분명한 블루오션 시장이 될 수 있다는 것. (2024 대한민국을이끄는외식트렌드 中 삶의 리듬에 맞춰 춤추는 식당 )
열명의농부
충북 충주시 신니면 장고개2길 62-46 / Tel 0507-1431-6262
메뉴 유기농쌈뷔페 성인 17,900원 초등학생 12,000원 유아 8,000원
영업시간 11:30-15:00(점심만 운영)
이윤화 음식평론가 ‘대한민국을이끄는외식트렌드’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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