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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객 이윤화의 오늘 뭐 먹지_한정식의 명품, 봉래헌
2020.08.31 | 조회 : 2,235 | 댓글 : 0 | 추천 : 0
식객 이윤화의 오늘 뭐 먹지
한정식의 명품, 봉래헌

오래 전 한식을 배우면서 가르치는 일을 한 적이 있었다. 한번은 선배강사가 아파서 대신 강의를 하게 되었는데, 요리가 신선로였다.
초보강사에겐 너무 높은 레벨의 요리였기에 연습만이 살길이었다. 거창한 이름만큼이나 이 호사로운 탕에 들어가는 수고는 만만치가 않았다.
평소 잘 접하기 힘든 여러 가지 전을 부치는 것이 그 첫 번째. 종잇장 같이 마른 석이버섯을 물에 불린 뒤 잘게 다져 달걀흰자로 지단을 부치고 신선로 그릇에 맞게 직사각형으로 반듯이 자른다. 십여 가지 신선로 재료 중 겨우 하나 완성이다.
꼬치에 가지런히 꽂은 미나리 줄기를 밀가루, 달걀에 노릇하게 지진 뒤 미나리 단면이 보이도록 썬다. 이렇게 또 하나 완성. 모든 재료의 손질과 마감은 하나하나 인내를 요하였다. 재료 준비가 끝나면 드디어 요술램프 같은 신선로에 재료들을 가지런히 담은 뒤 육수를 붓는다.
한껏 멋을 낸 재료를 결국 한 냄비에 몽땅 넣고 끓여 먹으니 결과는 좀 허탈한 전탕이다. 당시 이러한 신선로의 조리스킬만 전달했으니 대체 현대에 이 비효율적인 음식을 왜 배워야 되나 답답해하는 수강생들도 더러 있었다. 신선로의 깊이도 모른 채 강의하던 초짜강사가 전통한식을 이해하기까지 꽤나 시간이 필요했다.
어느 날 정성과 인내의 요리인 신선로를 쉼 없이 내온 전통 한정식을 만났다. 18년 전 오픈 때부터 오너와 뜻을 맞춘 봉래헌 이금희 셰프는 신선로의 베이스가 되는 육수 맛을 위해 오랜 연구를 거듭하고 있다.
겉으로 보여지지는 않지만 여러 가지 재료들이 육수 안에서 조화를 이루어야 하기에 맛의 중심축 역할을 담당한다고. 생새우를 구워 정성스레 우려낸 이셰프의 개운하며 시원한 신선로 육수는 전통 한식의 깊이와 번거로움의 가치를 깨닫게 하는 맛이다.
일반 한정식은 물론 내로라하는 호텔 한식당에서도 찬(반찬)담당은 비인기 영역이었다. 하지만 이셰프는 밑반찬 파트에서 음식 담아내기, 지단 부치기, 김치담기부터 시작하여 불을 쓰는 요리까지 모든 영역을 아우르는 경험이 본인의 자산임에 늘 당당하다. 봉래헌 초기엔 원하는 발효음식을 맘껏 사용할 수 없었다.
외부에서 구입하는 양념의 맛은 그때그때 다르고 깊은 맛에 한계를 느껴 결국 김치는 물론 된장, 간장 등 장류를 직접 담기 시작했다.
그 장으로 고기도 재우고 찌개도 끓이니 손님 앞에서 떳떳하고 자랑할 게 많다. 죽과 함께 나온 얌전한 나박김치가 집에서 먹던 맛 같아 노하우를 물으니 물김치는 항아리를 움직이지 말아야 되며 온도관리가 중요함을 재차 강조한다.
요즘은 한식 분야에서 독특한 상차림을 구현하는 곳이 늘고 있다. 한식인지 양식인지 경계가 모호한 창작음식을 해야 세련된 셰프 인양 인기몰이가 될 때도 있다.
그런데 이럴 때에도 묵묵히 전통 한식을 깊이 있게 지키는 곳이 있으니 그저 고맙다. 요즘 같은 여름날 봉래헌에 가면 신선로는 기본이고 오이채가 듬뿍 들어간 여름만두, 규아상이 초록 잎 위에 얌전히 나온다.
밀가루를 전혀 사용하지 않은 녹두산적, 실같은 고운 채의 구절판부터 된장찌개 그리고 다진 생강에 꿀을 넣어 졸인 강란(생란)이 코스의 피날레를 장식한다.
봉래헌의 음식은 변하지 않는듯하지만 알고 보면 작은 시도가 끊임없다. 시대에 맞게 짠맛, 단맛의 강도를 변화시키고 세련된 맞춤이 이어지고 있다. 마치 글로벌 명품 브랜드의 변화추이와 엇비슷하다.
봉래헌


주소 : 서울 강서구 방화대로 94 메이필드호텔 봉래헌
전화: 02-2660-9020
메뉴 : 런치한정식 58,000원부터 디너한정식 89,000원부터
이윤화 음식평론가 ‘대한민국을이끄는외식트렌드’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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