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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선영 작가의 오늘뭐먹지_비의 눅눅함을 잠재워 줄 무콩비지와 모듬전
2020.08.17 | 조회 : 2,185 | 댓글 : 0 | 추천 : 0
임선영 작가의 오늘 뭐 먹지
비의 눅눅함을 잠재워 줄 무콩비지와 모듬전

우산으로 하늘을 가리고 마스크로 호흡을 가리고 식당 앞에 도착했다. 테이블에 앉아 메뉴판을 둘러보았다. 모처럼 평온한 음식들이 편안한 가격과 함께 나열되어 있었다. 예전과는 식당을 고르는 기준이 달라졌다.
이전과 다른 것, 더 향기롭고 화려한 것, 더 자극적인 음식을 찾아 돌아다녔다. 식당은 새로운 사람을 사귀고 도전적인 일상을 시작하는 곳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요즘은 다르다. 좀 더 건강하고 좀 더 위생적인 것, 좀 더 믿을만한 곳을 찾게 된다. 생존을 위해 혹은 가족과의 조용한 식사를 위해 식당을 가게 되니 말이다.
피양콩할마니는 콩비지가 유명하다. 콩비지는 콩물을 빼지 않은 채로 맷돌에 고스란히 갈아내서 가마솥에 끓이는데 두유의 고소함과 비지의 바디감이 모두 살아있다.
경기도 연천산 백태콩을 쓰는데 수매 증명까지 벽에 붙여 놓을 정도로 재료 수급에 공을 들인다.
연두부처럼 몽글몽글한 콩비지는 오리지널 맛도 있지만 무를 넣고 끓인 것, 김치를 넣고 끓인 것, 버섯을 넣고 끓인 버전이 있다.
나는 뒷맛이 개운하고 소화도 도와주는 무 콩비지를 좋아한다. 콩의 아린 맛도 잡아주고 뜨겁게 혹은 촉촉하게 목으로 녹여 먹는 무의 맛이 사랑스럽기 때문이다.
이집 단골들이 잘 시키는 메뉴는 모듬전이다. 모듬전은 하나하나 맛있고 전체적으로 조화를 이루어 아이돌의 칼 군무 같다.
동그랑땡, 버섯전, 생선전, 고추전, 깻잎전이 소쿠리에 오롯이 담긴다.
튀김과 지짐의 중간선을 타며 달걀은 고소하게 익었고 속살은 촉촉하니 입술을 적신다. 뜨겁게 김이 오르는 전을 먹노라니 치이익 칙, 빗소리마저 음악으로 깔린다.
양파를 큰 덩어리로 썰어 넣은 양념장이 있는데 전을 퐁당 담궈도 짜지 않고 간이 좋다. 특히 버섯전은 아주 좋은 생표고를 썼다. 눈을 감고 씹으면 쫀득하니 젤리 같고 비온 뒤 땅의 향기가 이 코끝을 적신다.
깻잎전은 깻잎을 반을 접고 그 안에 다진 고기를 넣었다. 밀가루 없는 납작만두라 할까. 싱싱한 여름 고추를 반으로 갈라 그 안에 야무지게 고기소를 담은 고추전. 매콤함, 달콤함, 아삭함, 풋풋함, 고소함이 고추를 무지개처럼 수놓는다.
콩비지와 모듬전에 곁들일 메뉴는 더 있다. 콩국수와 들깨수제비. 콩국수는 맷돌로 간 콩물에 소금이나 설탕 간 없이 그저 순수하다.
질 좋은 국산 콩만이 지닌 올리고당, 단백질, 이소플라본, 지방산, 칼슘 등이 이런 맛을 내는구나 알려주는 교과서다. 들깨수제비는 마치 양식당의 크림스프를 연상케 한다.
오래 끓인 사골 육수에 들깨를 곱게 갈아 보드럽고 안온하다. 밀가루 수제비 대신 조랭이 쌀떡을 넣는다.
팔천원 콩비지 하나를 주문해도 맛깔스러운 반찬이 5종 나온다. 두부부침, 청경채 무침, 배추김치, 깻잎지, 더덕무침 등 그날에 따라 다르다.
삼삼하게 무친 깻잎지가 특히 맛있고 다른 반찬 모두 집밥처럼 편안하다. 반찬에 집게를 함께 주어 개인 그릇에 덜어 먹을 수 있도록 하며, 수저도 하나하나 종이로 감싸 위생적으로 관리한다. 신발은 벗어 외갓집에 들어가는 기분이다.
저녁에는 콩비지 백반은 되지 않고 콩비지전골로만 주문할 수 있다. 30여년의 역사가 쌓인 식당. 앞으로 30년 동안 마스크를 벗지 못하고 우산을 써야할 날이 있더라도 이 곳에 만큼은 다시 올 수 있기를 희망한다.
피양콩할머니

서울 강남구 삼성로81길 30
02-508-0476
무콩비지 8천원, 모듬전 2만7천원
임선영 음식작가· ‘셰프의 맛집’ 저자 nalgea@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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